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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入神:추사 김정희를 그리며
최경아 2019-08-13 11:15:31 조회 362

 

 

입신入神

 

 

 

탱자울타리 먹빛 내리면

심동(深冬) 새울음 잦아든다

세상만사 쓰이고 버림에도

고담한 신필 불계공졸(不計工拙)에서 노니니

열 개 벼루, 천 개 붓의 애닲음이

입고출신(入古出新)에 섰다

 

 

옛 우인 소식(蘇軾)의 행차에

어이 반갑지 않으랴만

인적없는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흐린 등불에

오랜 묵향만 타오른다.

짙은 먹놀림 한 획에 태허의 바람 일어

하얀 밤 지새워 춤춘다.

해탈의 춤을 춘다.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됨을 따지지 않은 경지
*입고출신(入古出新): 고전을 익힌다음  고전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
*소식(蘇軾): 송나라의 소동파, 당.송 8대가에 속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

 

 

 

 

추사-김정희-초상.jpg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정조10) ~ 1856(철종7)

 

 

 

조선의 후기사회에서 시서화에 능했던 천부적인 예술가이자 고증학, 실학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로서 당대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대가를 이룬 추사 김정희. 

그의 이러한 행적은 그가 태어나자 시들어가던 뒷산의 나무들이 김정희의 생기를 받아 다시 소생했다는 그의 탄생일화에서 보여지듯 타고난 천재였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그는 글씨의 창안하기 위해 일흔 평생 10개의 벼루의 밑창을 뚫고 천 개의 붓을 몽당붓을 만드는 각고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마침내 우리나라 고유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3살 때부터 붓을 잡은 추사는 7살 때 글씨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입춘첩(立春帖)’이라는 글씨를 대문에 써붙이자 남인 영의정 번암 채제공이 어린아이의 글씨를 보고 감탄하며,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글씨는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해질 것이니 절대로 붓을 쥐게 해서는 아니 되네. 대신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될 것이다.“

 

추사는 후에 윤상도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고 이후에도 다시 한 번의 유배생활을 하는 등 명필로 이름을 떨쳤으나 채제공의 예언대로 고초를 겪는 생활을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꼽히는 세한도와 추사체는 바로 그의 제주도 유배생활 중에 완성되었다.

 

금석학과 서화 방면에서 김정희의 명성은 청나라에서도 높아서 청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유하기를 희망할 정도였다. 고생을 모르고 자랐던 김정희였으나 부친 김노경이 유배되고 10년 후 자신마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게다가 친한 벗의 사망 소식과 아내의 사망 소식이 잇달으면서 김정희는 오직 책과 붓을 벗삼아 지낼 뿐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통역관이었던 제자 이상적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쉽게 구하기 어려운 최신 서적을 구해 보내주자 언제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는 제자를 보며 송나라 소동파가 그린 언송도(偃松圖)를 떠올렸다.

 

언송도(偃松圖)는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되었을 때 그의 어린 아들이 부친을 위로하기 위해 먼 곳까지 찾아오자 너무 기뻐 아들을 위해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이를 칭찬하는 글을 쓴 작품으로, 이상적이 보내준 책을 받아든 김정희는 자신만의 언송도를 그렸던 것이다.

논어자한(子罕)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는 의미를 담은 세한도.

 

 

 

세한도.jpg

초라한 집 한 채와 고목 몇 그루가 한 겨울 추위 속에 떨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면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찍은 인장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라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쓰였다고 하니 탱자나무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되는 답답하고 억울했던 유배생활이 아니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작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권력을 잃고 세상에서 유배되어 외로운 귀양살이 중에도 스승에게 예를 다하는 제자를 위해 그려준 이 작품은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다.

 

 

스승인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말했다.

 

"추사의 글씨는 여러 차례 변화했는데 제주도 귀향시절에 완성되었다

 

그의 글씨는 본래 중국 고대의 부문글씨와 옹방강의 글씨를 닮아 지나치게 기름졌으나 유배후에는 특정 글씨체에 구속됨이 없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했으며 그와 동시대 문인인 유최진은 추사의 글씨에 대해,

 

추사의 글씨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괴상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째서 좋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글씨의 참된 아름다움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법도에 구속되지 않는다

 

며 입고출신(入古出新)의 경지에 이르렀다 평한다. 법도를 충분히 익힌 다음에 법도로부터 자유로와진 것을 의미한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자 최후의 명작은 서울 강남 봉은사에 있는 경판각의 현판인 <판전>으로

아무렇게나 쓴 어린아이 글씨처럼 보이지만 그가 말년에 추구한 예술세계는 기교가 드러나지 않는 천진무구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글씨이다.

 

 

 

판전.jpg

봉은사의 <판전(版殿)>

 

 

그를 내내 따라다니던 고독한 그림자가 제주도의 바닷바람에 맞서 간결하면서도 깊은 고귀한 경지로 승화시킨 세한도,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종횡무진하며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추사체,

끝없는 고독과 억울함, 현실적인 어려움 등에 맞서서 온종일 글씨를 쓰고 또 쓰던 추사 김정희. 벼루가 뚫어져라 쓰고 또 썼던 글씨를 통해 그는 어디까지 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

 

한밤중 속리산 자락에 끝도 없이 쏟아지는 흰 눈을 바라보니 세한도의 고즈넉한 깊은 고독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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